https://youtu.be/KrwZD8Mx8CM?feature=shared
"모든 인간이 니만큼 생각할 수 있을 거란 전제를 버려."
제소라
M
179 표준
기계 3
1. 기민함은 때론 다정이 된다
너 어릴 때에는 조금만 발소리가 울려도 잠에서 깨어 울곤 그랬다. 어찌나 예민하던지 너 걸음마 뗄 때까지 밥 한 끼 제대로 먹어본 적도 없구. 그리 예민하던 애가 머리 길러 구부러지기 시작할 즈음부턴 신기할 정도로 무뎌지더라. 늘 울상이더니. 방긋방긋 웃어주는 얼굴이 얼마나 예뻤는지 모르지 너는. 애가 참 착하다면서 동네 사람들이 얼마나 너 좋아했게. 너 인사도 잘하고 싹싹하니 바르다고. 있잖아 소라야. 엄마는 그래. 너 어릴 때 내가 좀 고생한 건 다 이렇게 예쁘고 착한 아들로 크려고 했구나 싶어져.
웃음이 어린 어머니의 목소리를 들으며 제소라는 눈을 감았다. 소파에 누워 온몸에 들어가 있던 힘을 빼냈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의 예민한 기질은 무뎌진 것이 아니다. 그저 이 좁디좁은 방공호 안에서 적응하기 위한 생존방식을 터득했을 뿐이다. 고작 십만 명 남짓한 세계에서 날을 세워봤자 득 볼 것 없다는 생각을 어릴 적부터 깨우친 거지. 가지고 태어난 천성이 어디로 사라질까. 바깥에 한 번 나가면 모든 것이 자극이었다. 제각각인 사람들의 목소리, 트램이 다가오면 울려대는 땅, 흙 밑에서 무언가 썩는 냄새, 길을 지나가다 마주친 시선들. 무딘 태도를 고수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그런 것들을 모르는 체 하면 그만. 아 힘들다. 한숨이 절로 나왔다.
저 싫은 것은 하지 않는다. 그 원칙이 누군가 느끼기엔 다정이 되었다. 아무리 화가 나도 큰 소리 내지 않기. 상대가 곤란해 보일 땐 묻지 않기. 저질의 농담은 하지 말고, 상대의 기분에 따라 적당한 위로와 조언을 얹기. 무례한 말에는 웃음으로 무마하기. 무신경하다 보일 수도 있는 행동들이 어쩌면 이 얽히고설킨 비좁은 세계에서 가장 필요한 것들이라서. 부작용이 하나 있다면 늘 상대의 기분을 살펴야 하는 것 정도. 눈치 빠른 제소라에겐 상대의 손짓 하나마저 힌트가 되곤 한다. 감정노동도 노동이다. 고로 제소라에겐 하루하루가 중노동의 연속이다. 남 살피느라 본인 신경 쓸 기운은 남겨두지 않은 제소라는 늘 편두통을 달고 살아야 했다.
2. 적당한 거만과 시의적절한 발뺌
소라야 너는 꼭 언제든지 발 빼고 튈 준비 하는 애 같아. 이 구역 열정 많고 똑똑한 애들 널리고 널린 거 알지. 선생님이 걱정돼서 그래. 너 그렇게 자만했다간 걔들한테 추월당하는 거 한순간이야. 너 때문에 등수 밀리는 애들한테 예의 아니다 그거. 지금이야 머리 좋으니까 공부 설설 해도 성적 나오는 거지. 나중 가면 딱히 메리트 없다. 노력하는 애들 쌔고 쌨는데, 내가 보기엔 넌 걔들 절대 못 이겨. 운 좋게 인턴십 합격했어도 너 거기서 살아남으려면 더 열심히 해야 하는 거 알지? 선생님 말 새겨들어. 주머니에서 손 빼고.
선생의 말이 고막에 처박힐 리 없었다. 고작 열아홉. '고작'이라는 말이 가장 잘 어울리는 나이. 그 무엇도 되지 못하면서 곧 앞자리가 바뀐다는 기대감과 성취감이 아른거릴 그즈음. 미성년과 성년의 경계에 놓인 그 나이에는 제 주둥이 하나 통솔하지 못할 때가 종종 있다. 제소라에게서 언뜻 묻어나오는 거만은 어디에서 비롯되었는가. 그래봤자 다 같은 환경에서 똑같은 교육을 받고 자란 애들 사이에서 뭐 자랑할 게 더 있겠냐마는. 자랑할 거라곤 남들보다 조금 더 영민한 머리와 조금 더 곱상한 얼굴, 그리고 머리 아래로는 전무.
실습하느라 거칠어진 손마디는 제가 다 부끄러워 숨기는 편이었다. 주머니에 손을 꽂고 다니는 게 버릇이 되어버려 덕분에 조금 더 허세 가득 찬 꼴이 되었다. 싹싹하고 바르기만 한 제소라. 엄마 아무래도 그거 아니야. 손끝에 걸린 거스러미를 앞니로 뜯어내니 금세 핏방울이 맺혔다. 가진 강박은 갖가지 형태로 새어 나왔다. 혀 밑에서는 글자들이 서로 나오겠다며 치근대다가 사그라들었다. 여상히 웃어 보이며 고개를 꾸벅 숙였다. 목을 덮는 머리카락이 쏟아지며 엉망인 표정을 가렸다. 씨발 나보다 열심인 놈이 어디 있다고. 소리 없이 내뱉은 글자들 뒤로 적당히 기죽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네 알겠습니다.
3. 미치지 않으면 미치지 못한다
많이 다쳤어? 그러게 쉬엄쉬엄 하라니까. 야 근데 땀 냄새 미쳤다. 여기만 이렇게 덥냐 어떻게. 지금 몇 돈 지 확인해봐. 내 생각엔 이거 족히 삼십도는 넘는다. 다른 구역 놈들은 잘 모를 거 아냐. 사람 여럿 모여서 땀 흘리면 헛구역질 날 정도로 구린 거. 우리는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그래도 이럴 땐 꼭 살아있는 것 같다. 그러니까 기계 온 거지 니도. 수줍은 척 말은 안 해도 니도 이거 좋아하는 거 뻔히 다 보이거든. 실습만 나오면 상처 하나씩 달고 가는 새끼들 수두룩 하다지만 넌 항상 좀 유난스러워. 보기 싫다는 거 아니고 걱정된다는 말인 거 알지 제소라?
제소라가 한마디 대꾸 않는 동안 쏟아진 말들에 웃음을 터트렸다. 보기 드문 시원한 입매였다. 그 옆으로 주저앉아선 상희의 무릎에 묻은 흙먼지를 털어주었다. 이상희 말마따나 어제는 발등에 렌치를 떨어트려 멍이 들었고 오늘은 소방 파이프에 뒤통수를 박았다. 한동안 머리를 감싸고 못 일어나는 소라를 발견한 것도 상희, 혹이 났는지 봐준 것도 상희, 바닥에 눕혀 이름을 불러준 것도 상희. 실습만 나오면 나사 하나 빠진 듯 구는 소라에겐 없어서 안 되는 애.
우리 같이 인턴십 붙었으면 좋겠다. 낯 간지러워 뱉지 않았던 말이지만 소라는 그런 걸 바랐다. 성적이야 하위권을 달렸지만 실습만 나오면 저보다 똑 부러지지 않나. 같이 있고 싶어서. 쟤 없으면 나는 안 돼서. 얼마나 우스운 짓까지 했는지 모른다. 고개를 쳐들면 보이는 것은 어차피 하늘이 아니라 땅일 텐데도. 두 손을 모아 그 위로 머리까지 조아린 전적을 들키면 쪽팔려서 살 수가 없을 것 같다. 그만큼 간절했다. 그와 함께하는 게. 기초학교부터 시작해서 전문학교 그리고 이후 일어날 모든 사건에 상희가 지독히 엮였으면 했다.
이상희가 달고 사는 말이 있었다. 불광불급. 딱 그만치 열심히 살았더랬다. 언제라도 함께일 수 있도록 제소라고 이상희고 서로가 동기가 되고 목적이 되고 이유가 되어 살았다. 홀로 이름이 불리기 전까지는 영원할 관계였다. 마지막 이름 뒤로 상희가 불리는 일은 없었다. 축하해. 창백해진 쪽은 제소라였다. 너무 유난스럽다고, 너. 눈물을 쏟는 것도 제소라였다. 위로를 내가 하는 게 맞어? 웃자고 한 말에 웃을 수 없는 것도 제소라. 모든 게 다 틀어졌다. 생애 처음 패배감이 들었다. 첫사랑 앞에서 이리 엉망으로 무너지자고 미친 듯 살아온 게 아닌데. 상희야 씨발 나는 너무 속상해서 살 수가 없을 것 같애 이제.
정신 차려 미친 놈아.
諸素羅
08월 01일
00시 12분
RH+O
제4구역
투박한 손마디
손톱 옆 거스러미
입술 씹고 뜯는 버릇
전방 주시 직진 본능
연장 가방에 섬유탈취제
머리가 좋으면 몸이 고생을 안 함
하지만 젊어서 고생은 사서도 함
기계1학교 상위권 유지
탁상 설계보단 현장일 선호
운동화보다 안전화
Q1. 나는 전문학교에 자의로 입학했다 Y
Q2. 나는 컴퍼니 일원이 되고 싶다 Y
Q3. 나는 변화를 받아들일 수 있다 N